향유
쿠마의 무녀
✰향유
2012. 7. 15. 23:57
나는 정말 쿠마의 무녀가 병 속에 든 채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다.
한 무리 아이들이 물었지. "무녀야, 네가 원하는 게 뭐니?"
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. "죽고 싶어."
T. S. 엘리엇, 황무지 프롤로그
시빌은 한 줌의 모래를 들고서 아폴론에게 그 모래알만큼의 수명을 소원했다.
그녀를 사랑한 아폴론은 구애의 선물로 소원을 들어주었지만, 시빌은 영원한 젊음까지 약속 받는 것을 잊었다.
그 후 그녀가 사랑을 거부하자, 신은 그녀의 젊음을 지켜주지 않았고
시빌은 천 년의 세월동안 늙고 늙어 쪼글아들어 마침내 병 속에 담겨져 동굴 천장에 매달려 죽음만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다.
죽음보다 못한 삶
남은 삶이 곧 저주인
지금 이곳에도 쿠마의 무녀들이..
있다. 그런데
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명연장의 모험에 기꺼이 한 표를 던졌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.
그러니까 운이 나쁘게도,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생명연장의 지대에 들어선 것이다.
더러는 뼈가 부서지고 더러는 발이 썩어나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
단지 속으로만 바라보며..움직일 수도,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태로
그들은
기다리고 있다.
그 중 더.. 운이 나쁜 어떤 사람은
누군가의 한숨 소리를 견디며 그 기약없는 시간 동안 무기력한 분노와 싸워야 한다.